1992년 가을 본(Bonn)에 도착했을 때 나는 스물다섯 생일을 며칠 앞두고 있었다.
본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했을 때 내 나이 서른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지 넉 달이 되어갈 즈음에 남편이 청혼했다. 당시 남편은 독일에서 대학 졸업 후 막 취업을 한 상태였다. 잠시 한국으로 들어온 남편과 결혼식을 올리고 나는 다시 독일로 떠났다. 이번에는 학생비자가 아닌 결혼 이민 비자를 신청해놓고.
독일 어느 잡지사와의 인터뷰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
"독일에서 산 날이 더 많은데, 당신의 고향은 어딥니까?"
"내 고향은 내가 태어난 곳, 대한민국입니다. 여기서 산 날이 한국보다 많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독일에는 우리 집이 있습니다. 남편과 내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쉴 수 있는 우리 집이 이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오랜 타향살이를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그 '언젠가'가 이제 코앞으로 다가왔다. 내년 2023년 가을이다.
나는 결혼 후 독일에 살면서 국적을 바꾸지 않았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독일에서 오래 산다고 해서 태생을 바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독일 사회에서는 철저히 독일 사람으로 살았다. 이 사회에 들어와 살기로 한 이상, 다름에 대한 배려를 요구하기보다 내가 달라지고 맞춰갔다.
바쁜 일상 속에서 오늘이 어제처럼 지났다. 향수, 외로움, 그리움이란 단어는 말하는 순간 형체가 되어 나와 맞닥뜨릴까 봐 일부러 입 밖으로 뱉지 않았다. 애써 외면하고 살았던 감정들이었다. 귀향 역시 막연히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2020년 코로나로 재택근무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방에서 근무하고 저 방으로 퇴근하는 재택근무를 한 지 7개월 정도 됐을 때 나는 집에서 쓰러졌다. 병가를 내고 독일에서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넘치게 감사한 날들이었다. 후회되지 않는 삶이었다. 하지만 더는 꾹꾹 눌러온 내 안의 말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가 외롭다고.
들기름 짜 놨으니 가져가라는 엄마의 닦달이 듣고 싶다고.
형제들과 전 부치며 명절을 맞고 싶다고.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내게는 귀향이지만 남편에게는 고향을 떠나는 일이다. 30여 년간 당신 나라에서 살았으니 나머지 생은 내 나라에서 살자는 청천벽력 같은 제안을 남편은 받아들였다. 읍소와 협박에 가까운 나의 제안에 남편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떠날 시기는 남편의 뜻에 따라 2023년 가을로 정했다. 내년 추석, 우리들의 인천 상륙작전이 펼쳐진다.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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