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후반전

우리들의 놀이터

선한 부자-이현주 2022. 11. 2. 02:35

"우리, 놀이터 만들래?"

양평에서 꽃 심고 그림 그리며 사는 언니의 전화다. 형제들이 모두 은퇴하면 같이 놀 공간을 만들어보자 한다. 언니가 말하는 놀이터는 사무실이나 방 한 칸 개념이 아니라, 집 딸린 땅이다. 땅을 사서 집을 짓기에는 건축자재값이 많이 올랐으니 큰 텃밭이 있는 시골집을 사서 우리들의 놀이 공간으로 개조해 놀자고 한다. 솔깃한 제안이다.

 

형제들이 놀이터에서 같이 놀 마음이 있다면, 형부의 정년퇴직 후 우리들 곁으로 이사 오겠단다. 부모님과 막냇동생네가 이미 살고 있고, 내년이면 우리 부부도 들어가 살 파주로 말이다. 우리들의 놀이터는 각자의 거주지에서 이동 거리 15~20분 정도의 파주 외곽에 있는 땅으로 좁혀진다. 이보다 멀면 매일 가서 놀고픈 마음이 사라질 수도 있다.

 

놀이터는 놀이터일 뿐이다. 같이 놀다가 해 떨어지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투자가 아닌 놀자고 하는 일이니 큰 부담 없이 조금씩 보태 놀이터를 만들어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같이' 노는 상상을 해본다.

언니는 정원을 가꾸고 텃밭 농사 10년 차인 형부는 온갖 채소를 기른다. 볕 잘 드는 통창 가에 앉아 언니는 그림을 그리고 나는 마주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남편은 독일식 통곡물빵을 만들고 과수원집 아들내미인 제부는 포도를 심는다. 막냇동생과 남동생네는 뭐 하면서 놀려나? 낚시 좋아하는 동생은 임진강 어딘가에서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줄 거다. 생각만으로도 입꼬리가 올라간다.

 

우리가 농사지은 것들과 갓 구운 빵으로 이틀 정도 오일장을 열어 파는 것은 어떨까? 우리들의 놀이터가 5일마다 장터로 바뀌는 거다. 겨울에는 말린 허브로 우려낸 차를 화덕에 구운 고구마와 함께 팔아도 좋겠다. 이렇게 세상과 소통하며 용돈도 벌고 놀이터 운영자금도 조달하면 좋을 듯하다.

 

가만 보면 다들 재주꾼들이다. 20여 년 넘게 어린아이들 교육에 힘써온 남동생네,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자기 사업을 하는 제부,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이 가능한 막냇동생, 내년이면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정년퇴직하는 형부, 플로리스트이며 아티스트인 언니, 그리고 중국어와 영어에 능숙한 남편과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는 나. 우리 여덟이서 머리를 맞대면 나라도 구하겠다! 우리들의 놀이터가 각자의 재능을 모아 나눔과 봉사의 장소로 활용돼도 좋겠다.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같이 노는 놀이터라니!

 

은퇴자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곳이 한국에서도 생겨나고 있다. 나의 오랜 친구 하나는 중증 장애인들을 교육하고 돕는 기관의 장이다. 은퇴하면 동종업계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뤄 살겠다고 한다. 노년의 외로운 일상을 넘어, 함께 일하며 더불어 살고자 하는 움직임이 한국 사회에서 일고 있다.

 

노년의 공동체 생활에 관한 정보를 찾다가 은퇴 선배인 윤기평 작가의 책 ≪노년의 외로움을 넘어서≫를 읽었다. 우리들의 놀이터가 저자가 제안하는 '도농 복합형 생활공동체'와 많이 닮았다.

'도농 복합형'이라는 말은 가족과 함께하는 도시의 가정생활을 베이스캠프로 삼고, 한편으로 가족이 아닌 다른 동료들과 시골 생활을 공동으로 한다는 뜻이다. [...] '도농 복합형 생활공동체'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도시의 은퇴자들이 각자의 도시 생활을 유지하면서 공동으로 농가 주택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일상의 일부를 영위한다는 점이다.

≪노년의 외로움을 넘어서≫(윤기평 저 / 생각나눔)

 

저자는 생활공동체로 승화된 '노년의 뭉침'으로 외로움을 극복하고 후반생을 사는 재미와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우리들의 놀이터는 동료들 대신 형제들과 놀 곳이다. 일단 놀이터에서 함께 놀아보는 거다. 같이 노는 것이 좋아서 집으로 돌아가기 싫으면 아예 울타리 없이 모여 살아볼까?

 

형제들의 은퇴 시기가 다르니 처음부터 다 같이 놀 수는 없다. 내가 먼저 은퇴줄을 끊었고, 내년이면 남편과 형부가 은퇴한다. 우리 부부와 언니네가 놀이터에서 먼저 놀고 있으면 나중에 두 동생네도 같이 놀자고 하겠지.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당장 언니에게 전화해 놀이터 궁리를 해야겠다.

 

ⓒ 2022. 이현주
Straubing/Germ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