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94년부터 3년 6개월 정도 본(Bonn)에 있는 한글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다섯 학급에 학생 수는 50여 명 남짓의 한글학교는 독일 학교를 빌려 학기 중 토요일에만 운영되었다. 수업은 세 시간 동안 진행됐다. 본 대사관 분관에서 제공하는 ≪재외 한국 동포들을 위한 한국어 교재≫ 또는 국내의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를 교재로 사용했다.
학생들은 교포 2세, 한독가정 아이들, 그리고 유학생 자녀들이었다. 대부분의 교포 2세들은 고학년에 속했고 한독가정과 유학생 자녀들은 유치원생 혹은 저학년생이었다. 한글 자모부터 가르쳐야 하는 '한독가정반'이 내게 맡겨졌다. 아이들이 한국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되도록 한국어로 수업했고, 설명이 필요한 부분만 독일어로 말했다.
수업 중에 가끔 아이들에게 상처(?)받는 일이 있었으니 이런 경우다. 숫기가 별로 없는 열 살 인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물었다.
"질문 있구나, 뭔데?"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똑 부러지게 말했다.
"das Temperatur가 아니고 die Temperatur입니다!"
내 독일어가 틀렸다는 거였다. 장난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골탕 먹이려는 짖궂음도 엿보이지 않았다. 아이의 눈은 진지했고, 단지 나의 실수를 바로 잡아주려는 듯했다. 내가 자기의 한국어 실수를 고쳐 주듯이. 순간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아이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황했지만 정중하게 아이에게 고맙다 했다. 아이는 집에 돌아갈 때까지 의기양양했고, 나는 티 안 나게 풀이 죽어 있었다. 명사의 성 하나 제대로 사용 못 하다니... 그런데 말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독일어는 아이들의 모국어니까 내 독일어 실수를 지적하고 고쳐주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그 후 아이들은 내가 또 무슨 독일어 실수를 할까 싶어서 눈을 반짝이며 수업에 집중했다. 벼르고 있던 아이들에게 나의 실수는 꽤 즐거움이 되는 듯했다. 어떨 땐 녀석들이 이 재미로 한글학교에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덕분이었을까? 한글 자모를 배우던 아이들이 한 학기가 끝나갈 때쯤에는 두서너 줄의 한국어 일기를 쓸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내 독일어 실수도 줄어들었다. 나는 인이가 그때 바로 잡아준 단어의 관사를 지금껏 한 번도 틀려본 적이 없다.
독일 아빠와 한국 엄마를 둔 우리 반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제가 한국어를 배우는 이유는 엄마 때문이에요."
"엄마가 배우라고 해서?"
"아니요, 엄마와 대화하려고요. 엄마와 독일어로 말하는 게 좀 어려워요. 제가 한국어를 배워서 엄마와 얘기하고 싶어요."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직 변성기도 오지 않은 아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매주 토요일 세 시간이 주말 아르바이트 그 이상으로 내게 다가왔다. 엄마와 속마음을 나누기 위해서,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서 신나게 놀 수 있는 주말에 한글을 배우러 오는 아이에게 나는 어떤 마음으로 가르쳤던가. 내가 알바생에서 교사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한글학교를 통해서 교포 2세 교육과 비전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당시 독일에는 정식으로 한국사를 가르치는 곳도, 아이들이 읽을만한 독일어로 된 한국 역사책도 없었다. 94년 초 본 루카스(Bonn Lukas) 한인교회 김동욱 목사의 제의로, 당시 동아일보 특파원이었던 김창희 기자와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유학생들이 6개월간 교재를 만들어 16세 이상 교포 2세들에게 한글학교와 한인교회에서 2년간 한국사를 가르쳤다.
이 소책자는 독일에 거주하는 2세들을 위한 한국사 수업을 염두에 두고 작성된 것입니다. [...] 못난 역사는 못난 것대로, 찬란한 전통과 유산은 또 그것대로 이들 청소년들이 이해하고, 나아가 그 역사의 줄기에 자신도 맞닿아 있음을 한 번쯤 느낄 수 있게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문제의식이 [...]
교포 2세에게 한국사를 가르치기 위해 우리들이 직접 작성한 교재 ≪한국의 역사≫ 머리말 일부다. 각자 전공하는 분야는 달랐지만, 아이들에게 한국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동일했다. 모든 준비작업과 수업은 무보수로 진행되었다. 자료비와 복사비 등은 교회에서 보조받았다. 교재 작성과 수업 준비에 약 6개월이 소요됐다. 교안은 한국의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중심으로 작성되었고 필요한 자료들은 김창희 기자의 배려로 한국에서 조달되었다.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수업자료는 한국어와 독일어로 작성되었다. 우리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만나 교안을 검토하고 수업방식을 토의했다. 한국사 수업은 해당 시대의 개략적 성격과 그 시점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심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예를 들면, 고려시대와 인쇄술, 조선 전기와 한글, 조선 후기와 실학. 또한 동학혁명과 독일의 농민전쟁과 같이 독일의 유사 사례들을 비교 설명함으로써 수업의 흥미를 유발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수업 범위는 고대서부터 김영삼 정권까지였다.
현대사는 우리의 치열한 논쟁거리였다. 논쟁의 수위를 조절하며 적절한 용어 선택의 중심에는 김창희 기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맡은 교안의 독일어 번역을 위해 부러 독일 친구를 사귈 정도로 열심이었다. 우리는 뢰머라거(Römerlager)가에 있던 그의 집에서 모였다. 한국에서 공수된 신간들을 나눠 읽으며 교안 작성을 위해 머리를 맞대던 그의 집은 우리들의 도서관이었고 과 룸이었으며 내가 오랜만에 한국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를 위해 밥을 짓던 얼굴만큼이나 마음도 고운 그의 아내 덕분이었다.
한글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직접 만든 교안으로 한국사를 가르친 지 많은 세월이 지났다. 아이들이 자기의 뿌리를 묻는 순간에 한국사 수업은 도움이 되었을까? 엄마와 속 깊은 대화를 위해 한국어를 배운다던 그 아이는 지금쯤 나이 든 엄마와 깨알 수다를 떨고 있을까? 특파원 부부는 좋은 어른으로 나이 들고 계시겠지. 빡빡한 유학 생활에서 시간을 쪼개 한국사 교재를 만들고 가르치던 동지들은 어딘가에서 빛나는 삶을 살고 있을 거야. 궁금함에 살이 붙어 그리움이 돼버렸다.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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